Insight Note

Insight Note 006 유럽의 날강도 패륜 집단 스페인의 잉카인 학살-이래도 종교는 아무 잘못이 없나?

BoomSoon Dream 2026. 7. 9. 12:27

얼마 전 미디어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동이족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연합뉴스 김형우 기자의 기사 내용에 아메리칸 인디언 조상, 극동 바이칼호 주변에 살았다.”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인디언들의 기원을 두고 학계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인디언들의 조상을 러시아 바이칼호 주변에 살았던 고대인과 연결 짓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23일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과 UPI 통신 등에 따르면 독일 막스 플랑크 인류 역사과학 연구소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모스크바국립대 등이 주축이 된 국제 연구진은 최근 이런 조사 결과를 저널 'CELL'에 게재했다.

연구진은 옛 소련 고고학자들이 196070년대 러시아 극동 부랴티야 공화국 남쪽 우스티캬크타 지역에서 발견한 14천 년 전 고대인의 치아에서 나온 DNA를 게놈(genome·유전체) 분석한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인디언들과의 관계를 밝혀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독일 막스 플랑크 인류 역사 과학연구소 생물학자인 허위는 UPI 통신에 "이번 연구에서 관찰된 상부 구석기 시베리아인(Upper Paleolithic Siberian)과 아메리카 원주민(First Americans)의 강력한 연결고리는 양쪽이 동일한 조상(same admixed ancestry)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연구에 공동으로 참여했던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부 정충원 조교수는 연합뉴스에 "이번 연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바이칼호 주변에 살았던 고대인이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또 일부 유골에서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티스(Yersinia petis)라는 세균이 발견됐다고도 했다.

 

어째서 아메리카의 원주민이 인디언일까? 인디언이라면 인도반도에 사는 사람인데 인도와는 사뭇 떨어진 곳이기도 하고 언제 인도인들이 아메리카로 이사했나?

 

언제부터 인디언이라고 했을까요?

 

어떤 놈들이 거짓말 했을까요? 거짓말 한 놈들은 무슨 꿍꿍이가 있었어요

더구나 신을 믿는 놈들인데 그 신이 거짓말을 시켰어요. 그 신을 믿는 놈들은 온갖 상투적 거짓말과 인간으로써 하지 못할 짓을 다했죠. 애초 그런 신이 있다고 한 사람이 잘못이었어요. 지금도 그 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죠. 사람의 신이 아니었죠.

 

인디언을 위키백과에서는

미국 원주민은 원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기 전부터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 말하자면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하여 발견된 신대륙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원래부터 '인디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콜럼버스가 그들이 살고 있었던 대륙인 아메리카를 인도인 줄로 잘못 알고 '인디오(스페인어로 인도인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던 것에서부터 '인디언'이라는 유래되었다. 미국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부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때때로 논쟁이 인다. 한때, 미국의 메이저 리그의 속해있는 팀 중의 하나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인디언'이라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인디언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인도로 착각해서 잘못 만들어진 말이고, 인도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고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다. 발견 당시의 인구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약 1,300만 명(일반적인 추정치는 최소 1,200만명~최대 3,000만명)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좀 더 상세히 말하면, 북아메리카에 100만 명, 중앙아메리카에 300만 명, 남아메리카에 900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대륙 인구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있으나 최소의 수백만명설부터 최대 1억명설은 극단적인 주장으로 치부될 뿐이며, 대체적으로는 약 2,000만명~3,000만명설이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인구에 대한 최근의 일반적인 통념이다.라고 했습니다.

 

포루투칼 항구에서 떠난 콜롬버스는 과연 지금의 인도까지 다녀왔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왜 인도에 가려고 했을까요? 둘 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사기극 같은 이야기로 종결됩니다.

위키백과를 뒤져보니 콜로버스는 지금의 인도에 다녀온 게 아니었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대서양을 건너서 서쪽으로 게속 항해하면 아시아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항해거리에 대한 계산 오류로 서회항로 개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149283일 금요일 산타마리아호(기함), 니야호, 핀차호, 3척을 이끌고 팔로스 항을 떠나 일주일만에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하였다. 탐험대는 육지에 상륙하여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라고 부르는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라고 명명하고는 스페인 왕의 영토임을 선언하였다. 콜럼버스는 도착한 곳이 아시아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3개월이 넘게 지속된 탐험에도 원하던 금과 향신료를 찾지 못했으나 식량이 떨어져가고 피로가 누적되어 항로 개척이라는 성과에 만족해야만 했다. 1493925일에 출발한 2(1493) 항해는 콜럼버스의 선전에 따라 금을 찾으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1,200명이 참가하였으며 17척 대선단을 꾸렸다. 항해에는 농부와 장인 그리고 가축과 각종 종자를 실었다.

3(1498) 항해에는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데리고 갔다.

목적지인 남아시아에 다다르면 에덴동산의 거주자들이 이 두 언어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항해에는 반드시 금을 찾고자 먼저 적도부근으로 내려간 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것으로 항로를 정했다. 4차 항해 (1502) 15024월에 네 척의 카라벨선에 135명의 선원과 함께 출발했다.

선원중에는 그의 친 동생 바르톨메오(Bartolomeo)가 포함되어 있었고[44] 14살이 된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 페르난도를 비롯한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중략

 

150377일 콜롬버스가 자메이카에 도착하여 쓴 편지 내용에 보면

인도를 발견했을 때 저는 그곳이 가장 풍요로운 영토라고 아뢰었지요. 황금과 진주, 보석과 향신료는 뭉ㄹ론 인도제국에서의 무역과 시장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이 눈 앞에 바로 나타나지 않아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죠

 

암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징키스칸의 출현은 동서의 물꼬를 트는 뚜렷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방의 물자가 아무 세금 없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곤 했는데 몽골의 쇠퇴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족이 흥기하는 바람에 통로가 막히게 됩니다. 동서양 사이에 막을 친 것입니다. 당연히 고대부터 음식, 약이라고 먹던 향료가 유입되지 않고, 더구나 흑사병이라는 펜데믹이 유럽인들을 휩쓸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꾸밀만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스페인과의 잉카의 전쟁을 초점으로 하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건너뛰고 생략하고 합니다.

 

암튼 콜롬부스를 필두로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 미지의 대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는 이미 소규모 사람들이 오고 간 흔적들은 있습니다.

1492년 콜롬버스로 인해 빗장을 아예 걷어 내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53211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 깡패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최초로 마주친 사건이 역사를 바꾸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럼 이 파사로는 누구인지 알아봐야 겠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피사로는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의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6촌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략 1470년대 정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죽을 때까지 문맹으로 살게 되었다.

피사로는 150911월에 신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의 현재 콜롬비아가 있는 지역으로 항해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려 하였으나, 기후와 질병 등으로 인해 결국 식민지 사업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후, 한동안 거리를 전전하다 1513년에 또다시 항해단에 입단하여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한편,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관심을 갖게 했고, 그는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그는 1524년과 1526년에 각각 한 번씩 원정대를 만들어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는데,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나마의 총독은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지만, 피사로는 이를 거부했고 모험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끊임없이 남하했고, 15284월에 북부 페루 지방까지 진출하여 그 곳의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그에게 세 번째 원정을 나서겠다는 열망을 심어주었고, 이후 피사로는 곧바로 파나마로 돌아가 총독에게 지원과 함께 새로운 원정단 조직을 요청한다. 하지만 총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향해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려 나선다. 그의 계획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는 지원부대 뿐만 아니라 그가 점령하는 땅에 대한 지배권까지도 일부 손에 넣게 된다. 그는 이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모두 불러 모은 후 1530년에 파나마를 떠난다.

해안가에는 워낙 호전적이거나 이방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사로와 그 일행은 내륙을 통해 점차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피사로는 잉카인들을 무지비하게 학살합니다.

제러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와 위키백과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311, 프란치스코 피사로는 잉카 제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169명의 군인들과 69필의 말들을 같이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곧바로 남향하여 도시 툼베스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서 그들은 폐허가 되버린 도시를 보게 되었고, 잉카의 내전에 대해 듣게 된다. 1년 반 후, 스페인에서 원군이 도착했고, 피사로는 근방에 스페인식 식민도시를 세운 후 다시 길을 떠난다. 106명의 보병과 62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던 스페인 원정대는 곧바로 잉카 제국의 심장부로 진군하는데, 이 때 카하마르카에 머물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잉카 귀족을 사절로 보내 그들에 대해 알아오게 한다. 사절은 스페인군 캠프에서 약 이틀 정도 머무르며 스페인 군대의 무기, 화력 등을 조사한 후 다시 돌아온다. 보고를 받은 아타우알파는, 200명도 안되는 군대가 그에게 위협이 될 리가 없다는 판단 하에, 그는 스페인인들을 기습할 준비를 하며 동시에 스페인 군대를 카하마르카로 불러온다. 피사로와 그의 일행들은 밀림 지대를 전전하며, 15321115일에 마침내 까하마르카에 도착하게 된다.

 

피사로가 도착했을 때, 아타우알파는 도시 근처의 군사 캠프에 있었다.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 도착했을 때, 마을 안에는 몇 백명에 달하는 태양 신녀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페인인들은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들을 자신들의 임시 거처로 삼고, 15명의 기병과 통역사를 딸려보내 아타우알파에게 자신들의 도착을 알리게 했다. 후에 잉카인들의 기습을 우려한 피사로는, 그의 형제인 에르난도 피사로가 지휘하는 20명의 기병들을 추가로 보내었다. 대장의 아우인 에르난도 피사로는 인디언의 병력을 4만으로 추산했지만 사실은 8만 명이 넘었으므로 군대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축소했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를 도시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하였다. 아타우알파가 그 다음 날 도시로 들어오기로 동의하자, 피사로는 곧바로 황제를 붙잡을 계획을 꾸몄다. 피사로는 마을의 중앙 광장에 있는 건물 세 개에 스페인 보병들을 숨겨놓고, 소총수 몇몇과 석궁수들이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석축에 올라가게 배치하였다. 그의 계획은, 일단 아타우알파가 스페인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 설득하는 것이었고, 만약 그가 스페인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으면 곧바로 기습한다는 계획이었다. 다만, 만일 잉카 황제의 친위대가 너무 강력해 보인다면 이 계획은 모두 취소한다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다음 날, 황제는 정오 쯤에 캠프를 떠나 도시로 향했다. 상징적인 장식물들은 든 수 백명의 사람들이 그를 호위했다. 워낙 이 행렬이 느리게 움직였기에, 피사로는 에르난도 피사로를 보내 그 행렬이 적어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도시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아타우알파는 늦은 오후에 마침내 도시로 들어왔다. 6,000명에 달하는 호위 병력들이 작은 도끼, 무기들을 들고 그와 함께 들어왔다. 당시 그는 매우 취해 있었는데, 이는 행렬이 멈출 때마다 그가 술을 마셔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도시로 들어온 직후에도, 그는 가마 안에서 더 많은 술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도시로 들어온 잉카인들은 그 어떤 스페인 군사도 보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모두 건물 속에 숨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그들을 맞은 사람은 도미니코회의 수사 발베데코로, 통역가 한 사람 뿐이었다.

 

발베데코 수사가 정확히 무엇이라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아타우알파에게 피사로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말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아타우알파는 이에 응하지 않고, 대신 스페인인들이 잉카 제국으로 들어온 이래 약탈한 모든 것을 다시 돌려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발베데코 수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설교를 잠시 하였다. 다만 이 때 '레케리미엔토'라고 불리는 조서는 읽지 않았다고 한다. '레케리미엔토', 스페인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의 문서로, 이 문서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문서의 내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쨌든, 아타우알파는 수사의 설교 대신 그가 들고 있던 성경책에 더 관심을 보였고, 수사에게 성경책을 잠시 보여달라고 한다.

아타우알파는 잠시 성경책을 훑어본 후, 이 책을 바닥에 던지고 만다. 이에 격분한 수사는 곧바로 피사로에게로 돌아가 공격하라고 요구하였다.

피사로가 공격 신호를 보인 그 순간, 스페인 군대가 건물들 속에서 쏟아져 나왔고 잉카 호위병들이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이에 황제를 포로로 잡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때 피사로가 직접 황제를 붙잡는 것을 지휘했고, 황제를 잡기 위해 그를 수행하고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참고로 단 한 명의 스페인 병사도 이 공격으로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117, 스페인 군대는 아타우알파가 머물던 캠프를 공격하였고, 그 곳에서 수많은 황금, , 에메랄드 등을 찾아낸다. 스페인 사람들이 금과 보석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아타우알파는, 만약 그들이 그를 풀어준다면 2달 안에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에 달하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만한 금과, 이 양의 2배에 달하는 은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보통 사람들은 아타우알파가 그의 자유를 위해 이런 제안을 했다고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역사 문헌들을 보면 아타우알파가 자유는커녕 목숨의 보전을 위해 이 제안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대다수의 기록에는 스페인 군인들이 황금을 얻은 후에도 황제를 풀어주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 후, 잉카 대군의 기습을 두려워 한 스페인 군인들은, 아타우알파가 포로로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사로는 임시로 법정을 세우고, 아타우알파를 우상 숭배, 스페인에 대한 반란, 우아스카르 살해 등에 대한 죄목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아타우알파는 화형당하는 벌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의 잉카인들은 만약 시체가 사라지면 결코 내세에 갈 수 없다고 믿었기에 아타우알파는 경악했다. 이때, 발베데레 수사는 그에게 만약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화형은 아닐지라도 교살로 형을 낮추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아타우알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프란치스코 아타우알파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강력한 앞선 전쟁무기들로 잉카인들을 학살했고, 터전을 잃은 잉카인들의 투쟁이 계속할 때마다 스페인의 군대는 잉카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페루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의 대부분을 죽입니다.

더구나 스페인의 종교는 천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다 개신교로 바꾼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이런 사실은 양대 종교 때문에 선량하고 죄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져온 커다란 실수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어쩌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지요.

 

얼마 전 페루의 쿠스코에서 트레인을 타고 마추픽추를 다녀왔습니다.

 


Insight Note

지금 잉카인들은 페루로 독립했지만 곳곳에 성당이 세우져 있고, 스페인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전통이 사라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잘못된 시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들, 잉카인들은 없었습니다.

생김새만 오래전 사진에서 본 조상 닮았고, 생활 대부분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고갯길에 사는 그냥 폐루인들이었습니다.

스페인 인 피사로가 잉카인들을 학살할 즈음 우린 임진왜란(1592)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아직 우린 일본어, 중국어가 아닌 우리의 글을 읽고 쓰고 사용하고 있고 유럽 깡패들처럼은 못살아도 나름 잘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께서는 그냥 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더욱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