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Note

Insight Note 003 아편과 아편전쟁

BoomSoon Dream 2026. 7. 7. 10:25

인간의 최대 약점은 태생적으로 아픈 통증에 취약하고 잘 참지 못하게 설계되었죠.

그래서 일찍부터 통증을 못 느끼고, 가라앉히는 진통제를 사용했습니다,

그 역사의 소급이 무려 5,000년을 넘고, 아편을 재배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스위스 지역 신석기 유적에서는 양귀비를 사용한 흔적과 이집트에서는 사용한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지중해 섬 키프로스의 유적에서는 아편을 가루로 만들어 흡입한 파이프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아편은 양귀비에서 추출하는데 일종의 마약으로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재배 금지된 식물입니다.

양귀비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파파페르 솜니페룸(Papaver somniferum), 세티게룸(Papaver setigerum) 종에서만 마약을 추출할 수 있답니다.

화려한 꽃을 자랑하는 양귀비는 하얀색과 붉은색, 보라색 등 다양한 색으로 우리의 눈을 유혹할 정도로 아름답게 핍니다. 꽃이 떨어지면 씨방이 맺히는데 이것을 상처 내면 하얀 우유빛 액체가 나옵니다.

이 액체를 말리면 아편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고대 문학의 정수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는 이 약을 섞어 마신 자는 눈앞에서 가족이 죽어도 한나절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슬픔을 잊게 해주는 약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가 멸망한 후 아편 사용은 로마에서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명상록을 저술한 로마 5현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효능이 좋았는지 곳곳에서 문헌과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야만적인 전쟁으로 사회 전반을 향상한 십자군 전쟁은 실로 다양한 문물이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 등이 물밀듯이 서양으로 전래되었던 것입니다.

이때에도 서양으로 아편이 전해지고 의약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16세기 연금술사, 의학자인 파라켈수스는 아편으로 환약을 만들어 만병통치약으로 팔아먹었습니다.

17세기에는 영국에서는 적포도주 등의 술에 적정량의 아편으로 녹인 제품인 아편팅크가 감기부터 온갖 병을 낫게 해 주는 만병통치약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대중적인 호응으로 아무 제재 없이 사용되는 바람에 유통, 소비 생산에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몰핀이란 이름을 얻게 됩니다.

1803년 의약품 연구원 프리드리히 빌헬름 제르튀르너는 아편에 산과 염기를 순차적으로 더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유효 성분만 결정으로 추출하는 실험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 약품에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이 성분에 그리스 신화 잠의 신 모르페우스에서 차입하여 모르핀으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이 가루가 어째서 인체의 복잡 시스템에 관여하여 문제를 일으킬까?

수많은 연구 끝에 1970년대 들어서 인간의 뇌에 작용하여 단기적 행복감을 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뇌의 뉴런과 뉴런이 연결되는 시스템에서 정보전달과 수용체 부분에 작용하여 엉터리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르핀 구조가 아미노산 5-30로 연결된 펩타이드라는 정보전달 물질인 엔드로핀의 구조와 흡사하기 때문에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이었습니다.

엔드로핀은 인간의 고통을 어느 정도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엔드로핀의 분비는 우리의 행복함을 알려주는 물질이기도 합니다.

모르핀을 섭취하거나 흡입하면 임시 단기간에 행복감을 찾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모르핀을 계속 주입하면 엔드로핀은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분비를 중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모르핀 주입을 중단하면 아주 불행하다고,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불면증, 오한, 두통, 구토 등의 증상인 마약 중독입니다.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은 중국에 아주 끔찍한 사건이었죠.

이 아편전쟁 이야기는 세계 역사를 뒤집어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말이 문명과의 만남이었지, 인도에 마약 생산 기지를 두고 아편을 동남아로 팔아 이익을 챙긴 영국의 마약 장사입니다.

이때 인도인 중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 타고르의 할아버지도 마약 장사를 했습니다.

이 아편은 켈커타에서 선적되어 싱가포르를 거쳐 중국 양쯔강 중류로 거슬러 올라가 판매하게 됩니다.

올바른 놈들이라면 마약 장사를 하지도 않았을 거며 지금의 홍콩이 서구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다가 중국을 여러 버러지 같은 유럽의 깡패들이 문명을 연다는 기치 아래 달려들어 대련, 천진, 청도 등을 조차지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편전쟁은 아편의 폐해와 동서양 균형의 문제로 커다란 국제 이슈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발생한 막대한 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수출하는 최악의 수단을 선택했습니다. 청나라는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대제국(덩치만 큰 나라)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관료들의 부패와 군사 기술의 낙후로 골고루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초기에는 여전히 아편이 명나라처럼 황실과 상류계층에서만 유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편은 부와 교양의 상징처럼 여겼습니다.

16세기에 담배가 도입되면서 무엇을 피우는 문화가 중국에 도입 됩니다.

17세기가 되면 담배는 중국 노동자들에게 보급될 만큼 일반화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발명한 방직기계에서 생산한 면직물을 청나라에 판매하였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인구를 가진 청나라였기에, 그들이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한 면직물이 영국산 기계 면직물보다 오히려 저렴했습니다. 영국의 착각이었죠.

그리고 영국의 일반가정은 월수입의 5%를 차 구매에 사용했는데,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 규모의 90%를 차가 차지하면서, 영국의 적자는 늘어갔고 막대한 영국의 은이 청나라로 유입되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무역적자를 타개할 목적으로, 값싼 인도산 아편을 축구공 모양으로 만들어 약상자에 넣어 밀무역으로 청나라에 유통시켰습니다.

명목상 청나라에서 아편은 약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면 1,000배의 이익이 남을 정도로, 인도의 아편은 저렴했습니다.

이에, 청나라의 아편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고 사회 최하층까지 아편에 손을 대게 되면서, 사회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의 아편 수입량은 1770년대에 연평균 200상자였습니다.

그러다 1838년에는 1년에 4만 상자까지 수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아편 중독자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1800년 이전에 3억명 중에 아편중독자가 10만명이었지만, 1839년에는 1,000만 명이 사용할 아편이 수입되었습니다.

참고로 아편전쟁 후에도 아편중독자는 계속 늘어나서, 20세기 초에는 4,000만 명이 아편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 시절에는 상하이 시의회 등 정부가 아편을 공급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볼 장 다 보았다고 봅니다.

이제 중국 정부에서는 큰일 정도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폭락까지 이르게 됩니다.

18381231일 황제 도광제는 아편문제 해결을 위해서, 임칙서를 흠차대신과 광동수사로 삼았습니다. 참고로 도광제는 아들 3명을 아편중독으로 잃었던 인물입니다.

이때가 되면 청나라 어전회의 도중에 대신들이 아편을 피울 정도였습니다.

임칙서는 아편 21,306상자를 압수해 폐기하고, 마약상인 60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상인들에게 아편무역을 중단할 것과 아편밀매를 하면 자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행동이 어쩔 수 없었음과 아편무역에서 영국이 손을 떼도록 호소했습니다.

임칙서가 영국 아편을 폐기한 후에, 영국 해군 수병이 중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바람에 청나라는 마카오에서 영국인들을 추방했습니다.

1839113일에 중국 광동성 주강하구 호문 해협의 입구에서 드디어 일전을 했습니다.

영국의 작은 무장상선 2척과 청나라 정크선 29척이 싸웠는데, 청나라 정크선 26척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흠차대신 임칙서는 서양화포 300문을 사서 강안포대에 배치하여 주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국제 철제 증기선까지 사들였습니다.

영국의 청나라에 대한 무역은 제1차 아편전쟁 후에도 여전히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아편의 자체 생산을 늘리고, 난징조약에서 관세를 제한해 준 덕분에 자유무역의 효과가 생겨 청나라 차의 영국 수출량이 오히려 증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면직물은 청나라의 것이 품질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기에,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시작되었습다. 또한 광둥성에서 대영항쟁까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정부가 애로호라는 청나라 배를 단속하였습니다.

애로호가 해적질을 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 청나라 사람이었지만, 선주가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은 청나라가 애로호 단속 과정에 영국 국기를 바닥에 던져 모욕했다며, 다시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사후 조사에서 영국 국기는 발견되지도 않았습니다.

영국하원은 전쟁을 부결시켰고, 1차 아편전쟁을 비판했던 글래드스턴은 정부 불신임안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수상이었던 파머스턴이 하원을 해산시키고, 투표를 통과시켰습니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빌미로 전쟁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더구나 러시아까지 청나라 영토 내로 진격해 들어왔습니다.

열강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하고, 18586월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텐진 조약 1조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아편무역의 합법화였습니다.

톈진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청나라의 후속조치가 미흡하다는 핑계로 계속 진격하여 1859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다구포대의 청나라군이 대포를 발사하여, 영국과 프랑스 함대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병력을 증강하여, 1860년에 영국군은 173척의 함대에 2만명, 프랑스군은 33척의 함대에 6,300명을 이끌고 되돌아왔죠.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발해만의 주요 항구를 초토화시켰고, 다구포대로 가서 복수하고 톈진에 상륙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했는데 함풍제와 신하들은 열하로 피신했다.

한편 베이징에서 30리 떨어진 팔리교 방어에 나선 청나라 장수는 몽고 출신의 49세 장군 승격림심이었습니다.

그는 태평천국운동 반란군을 진압하며, 당시 청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대접받았죠.

청나라의 총 병력은 27,000명이었고, 이 중에서 몽골 기병이 중심이 된 기마병이 12,000명이고 보병이 15,000명이었습니다.

반면, 영국은 4,000, 프랑스는 8,000명으로 청나라의 군대의 3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승격림심의 기마대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향해 돌격했으나, 대포와 라이플 소총에 쓰러져 갔습니다.

몇 시간 만에 전투가 끝났고, 청나라는 12,000의 기마병 중에 10,000명이 전사하고 2,000명이 살아남았습니다.

반면 영국군은 2, 프랑스군은 3명이 전사하여 서양군대는 총 5명만 피해를 입었습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어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나라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습니다.

원명원은 청나라 황제에게 바친 진상품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였죠. 약탈 후 건물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었습니다.

텐진조약에 더하여, 개항 도시를 늘리고, 전쟁배상금도 늘어났으며, 영국에 홍콩을 할양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게 연해주까지 빼앗겼습니다.

참고로 제2차 아편전쟁으로 얻은 청나라의 유일한 이득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것이었습니다.

청나라와 서양 열강이 협력하게 되자, 홍수전은 두려움에 자살하고 남경이 함락되고 태평천국은 멸망해버렸다 - 위키백과에서


이렇듯 아편은 한나라의 국운에 달린 문제였지요.

 

아편은 약효가 탁월합니다. 지금도 모르핀은 말기 암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완화해주는 효과적인 약제입니다.

이렇듯 양면성의 아편은 인류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진통 작용에 관여하는 수용체로만 약을 만들면 꿈의 진통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빌미로 서양의 약탈이 정당화되고 동양과 서양의 사뭇 달라지게 되었죠.

이 와중에 영국의 깡패짓은 극에 달했고 서양 조폭들이 동양으로 밀려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덩치만 컸지 나라가 망해가던 청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두둘겨 맞아 온몸이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지고, 머리까지 크게 다치게 되어 정신까지 잃어버리고 자기 다리, 몸통을 모두 서양 열강에 내주게 되었죠.

서양은 지금도 수많은 철학과 평화, 정당화를 외치고 문명이 앞서갔다고는 하지만 다 약탈한 것으로 만든 것이죠.

그런 도의 없는 행동이 아편전쟁이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젠틀맨이라 불러 달라고 ...

 

"법을 말하면서 마약을 팔고, 평화를 말하면서 군함을 보낸다."

 

당시 영국의 의회에서도 이 전쟁을 두고 "영국 국기에 이보다 더 유해하고 영구적인 오점을 남긴 전쟁은 없었다"며 반대했던 양심적인 정치가(윌리엄 글래드스턴 등)가 있었죠.

하지만 자본과 탐욕의 논리가 승리했고, 영국은 스스로 외치던 '자유, 인권, 문명'이라는 가치를 스스로 짓밟히게 되었죠.

이렇게 이룩한 화려한 자산과 철학의 밑바탕에는 이렇듯 식민지 약탈과 마약 밀매로 쌓아 올린 피 묻은 자본이 있다는 비판은 아마 계속될 것입니다.

이걸 보다 못해 억압과 저항으로 물든 잔혹사의 제목으로 펴낸 캐럴라인 엘킨스의 신작 폭력의 유산(Legacy of Violence)이란 책에서 영국의 역사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젠틀맨'이라는 멋진 단어 뒤에 숨겨진 가장 어두운 민낯이 바로 아편전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