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전략/사기 - 사기열전

사기열전 003 관안열전 - 2 안영편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

BoomSoon Dream 2026. 7. 7. 17:34

춘추 전국시대 서로 싸우던 시절 제나라의 안영은 주나라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이었습니다.

자는 중, 시호는 평. 안약의 아들로, 제나라 래 지방의 이유 사람입니다.

BC 400년 중후반에 태어났으니, 춘추시대(BC770-403)의 시기이니 아직 전국시대(BC403-226)가 오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제나라 영공, 장공, 경공 3대를 걸쳐 봉직하면서 40여 연간 정치에 몸담게 됩니다,

3대를 섬긴 재상으로서 절약 감소하고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가 래 지방이 고향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나라 영공 11(BC 571), 래 나라를 공격해 래 나라의 뇌물을 받고 퇴각했습니다만 이일로 나중에 망하게 됩니다.

그때 노나라로 시집간 제나라의 공녀가 죽어 장사를 지냈는데, 래 나라 공실이 강 씨여서 제나라와 동성이기 때문에 래 나라 자작을 문상하러 오라 합니다.

근데 간뎅이가 부었는지 오지 않자, 안영의 아버지 안약을 파견해 동양이란 곳에 성을 쌓아 래 나라를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영공 14(BC 568)에 안약이 동양에서 래 나라를 아예 포위하여 래 나라가 고립되자 그다음 해 영공 15(BC 567) 3, 래 나라에서 왕추, 정여자라는 자가 당읍(지금의 평도시) 사람들을 거느리고 제나라 군대를 오히려 공격하게 됩니다.

제나라는 이들을 박살내게 됩니다.

래의 공공은 당읍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다음 4월에는 진무우가 래 나라 종묘의 기물들을 취해, 내 나라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선군 제환공의 둘째 아들 제혜공의 종묘에 바쳤습니다.

이에 안약은 래 공공이 도망간 당을 7달간 포위하여, 11월에 전쟁을 끝내고 내나라 유민들을 예나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전쟁터로 파견된 안약이 안영을 낳아 래 사람이라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럼 이 래 나라와 예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내 나라 역시 춘추시대 자그마한 제후국으로 역시 성씨가 강씨였죠. .

상나라 이전에 황제의 후예가 주루 부락을 건립했던 곳으로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주루 부락은 제후국으로 봉해져서 국명을 가진 제후국으로 정해집니다.

의 그 옛 수도는 역산 지금의 산둥성 지닝시 남쪽입니다

주공 단이 주성왕을 대신해 섭정하던 시기에, 쇠약해진 제후국의 세력을 모아서 나누어 다스리게 한다는 술책을 써서 주()나라 이보안(夷父顔)이 주 왕실에 공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둘째 아들인 우를 예 땅에 봉하여 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나라는 원래 주()나라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이름을 소주(小邾)로도 부른다고 합니다.

래 나라는 제나라 영공 11(BC 571), 래 나라를 공격해 래 나라의 뇌물을 받은 계책에 의존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합니다.

, 예 이런 나라들은 서쪽의 발달한 주나라와는 달리 동이족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죠.

그림과 표에서 보면 내 나라는 내이, 회이라고 기타 조그만 제후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공 19(BC 563), 아들 광을 태자로 세우고, 고후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아, 제후들과 회견하여 함께 정나라를 치게 했습니다.

영공 25(BC 557)에 진나라의 패업에 반기를 들고, 진나라를 성실히 따르는노나라를 공격하여 두 차례 침입해, 노나라 성읍(맹손씨의 채읍)을 포위했으나 맹유자의 반격에 패배하게 됩니다.

영공 26(BC 556)에 노나라 북쪽 변경을 쳐 자신은 도읍을 포위하고 고후에게 노나라 권귀인 장손씨의 방읍을 포위하게 했으나,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 등의 활약으로 방읍에 있던 장흘이 탈출하자 장흘의 동족인 장견을 사로잡은 채로 퇴각했죠. 이때 안영의 부친 안약이 병사하자, 안영이 등장하여 부친의 상대부 직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사마천 사기표에는 안영의 상대부 즉위와 진나라가 임치를 점령한 것이 551년으로 시기가 몇 년 차이가 납니다.

또 영공 27(BC 555)에 노나라 북쪽을 또 쳤습니다.

제 영공이 거듭 노나라를 치자 도가 지나치다고 느낀 진나라는 11개국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칩니다.

이때 도성의 여성 사이에 남장 풍습이 유행하여, 영공은 이를 중지시키라는 금령을 몇 번이나 내렸습니다.

애초에 이러한 유행은 영공의 비빈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영공은 금령을 자신의 비빈에게는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남장 풍습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괴이쩍게 여긴 영공은 근시였던 안영에게 이유를 묻자, 안영은 군께서 하고 계신 것은 소의 머리를 간판에 걸고 말 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궁정 안에서부터 금한다면 유행은 곧 사그라들 겁니다.’라고 충언했죠.

영공이 이 말을 옳게 여기고 그대로 시행하자, 도성 내에서 남장 풍습은 곧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안영이 말한 4자 성어 우두마육(牛頭馬肉)’이 생겼고, 나중에 그게 변하여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4자 성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한참 진() 나라가 패권을 잡던 시절이었죠.

이 진나라는 이때 그래도 절의를 지키고 주 봉건에 어느 정도 충성을 했던 체계가 이 진나라가 3개로 쪼개지면서 전국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진나라는 문공 때부터 서서히 나라에 혼란이 오고 실정하기 전까지 계속 천하의 패권을 놓고 남쪽 초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힘이 있었습니다.

또한 임금이 부흥을 위해 이곳저곳에서 신하들을 중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면서 점차 경들의 세력이 진나라에서 강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경공 때 들어 악화한 정치로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잃었고 권력이 신하 경대부에게 넘어가 임금이 아무 일도 못 하는 허수아비가 됩니다. 그 경대부들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조씨, 위씨, 한씨, 지씨, 범씨, 중행씨 6개 경대부만 남아 그들도 역시 서로 싸우게 됩니다. 그중 범씨와 중행씨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씨, 위씨, 한씨, 지씨가 범씨와 중행씨를 진나라에서 축출하여 제나라로 몰아내고 그 땅을 각각 나눠 차지하였다. 경대부의 영지가 임금의 영지보다 더욱 넓어졌다.

진나라 열공(烈公) 때 드디어 경대부들이 자신들의 영지에서 각각 조, , 한 세 나라로 분리되고 이를 삼진(三晉)이라 했습니다. 나중에는 진나라는 영토가 를 그대로 깎여 영토가 신강과 곡옥이란 두 읍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 진나라가 패권을 잡은 들어온 연합군에

제 영공은 평음에서 방문에 해자를 파고 수비했으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죠.

범선자가 제나라 석문자를 통해 영공에게 슬쩍 노나라와 거나라의 별동대가 제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라고 슬적 흘렸습니다. 그러자 영공은 두려워하였고, 영공은 또 진나라 군세를 보러 갔다가 진나라가 펼친 가짜 진영을 보고 겁에 질려 당시 수도였던 임치로 도망하게 됩니다. 진나라는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려고 했으나 노나라와 위나라의 부탁으로 제나라의 요새를 공략하여 경자시를 공략하였으나 노에서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연합군은 바로 임치성을 포위하여 각각 서로 용맹을 뽐내었다. 이에 영공은 두려워하여 우당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태자 광과 곽영이 만류하고 억지로 가지 못하게 하여 달아나지는 않았습니다.

연합군은 제나라 경내를 휩쓸다가 초나라가 연합군의 일원인 정나라를 공격하였으므로 퇴각했습니다.


안영이 상대부가 된지 2년 뒤 BC 554년 영공은 광을 폐위하고 자아를 세워 태자로 삼게 됩니다.

영공이 첩을 얻어 낳은 자식의 서모가 공자 자아를 낳아 영공의 애첩 융자에게 맡긴 것이 사태를 키웠습니다. 영공은 융자의 청을 받아들여, 광을 폐하여 동쪽 읍으로 보내고 공자 아를 태자로 삼았으며 원래 광의 태부인 고후를 자아의 태부로 삼고 숙사위를 소부로 삼게 됩니다.

영공이 병이 들자, 최저가 광을 모셔 와 도로 태자로 삼았고, 광은 융자를 죽여 그 시체를 발기발기 찢어 조정에 내걸었습니다. 그해 5월에 공자 자아를 체포하여 죽이고, 최저는 8월에 고후를 죽였습니다.

그러던 중 숙사위라는 자가 고당으로 도망가 반란을 일으키자, 경봉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자 친히 고당을 쳐, 성에 들어가 숙사위를 잡아 소금젓을 담았습니다.

BC 553년 영공이 죽게 됩니다. 이래서 그해 3월 보위에 오른 광이 즉위해 제25대 장공이 됩니다.

광은 최저와 함께 자아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진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를 또 징벌하러 옵니다.

 


유력 제후국 ((((((((((((()
지역별 제후국 산둥성 (((((((((()
허난성 (((((((동괵(東虢((((((()
산시성 (서괵(西虢북괵(北虢(()
섬서성 ((()
호북성 ((()·(((()
호북, 랴오닝성 (중산(中山((고죽(孤竹)
쓰촨성 (()
장쑤,저장,안후이성 (()
기타 제후국 (((((((((((((((((()

장공 때에는 최저가 재상이었습니다.

제 장공(莊公) 때인 BC 551, 진나라의 경(대신급의 최고위 귀족)인 난영이 사개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해 왔습니다. 이 해에 공자가 태어납니다. 

장공은 난영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그에게 힘을 빌려주어 진나라의 내분을 이용해 이익을 보고자 하였죠. 이에 안영은 크게 반대하였으나, 장공은 아랑곳 않고 난영의 복수극을 도와 진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안영은 여러 차례 장공에게 간언을 올리나 장공이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자, 안영은 사직하고 시골로 내려가 밭을 갈면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사이 장공은 자신의 사부이자 자신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재상 최저(崔杼)의 미모의 처와 밀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최저는 격노하여 기원전 5485, 자신의 집에 장공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를 들은 안영은 급히 도성으로 달려갔죠.

만약 장공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요, 그렇다고 최저의 편을 들면 불충한 신하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안영은 나 혼자만의 군주가 아니니 따라 죽지 않을 것이오. 내게 죄가 없으니 도망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군주가 죽었으니 그냥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고 말하고, 최저의 집에 들어가 형식대로 정중히 곡례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최저의 가신이 안영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인망이 높은 안영을 죽인다면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한 최저가 이를 말리게 됩니다.


그 후, 최저는 경봉(慶封)과 함께 장공의 이복동생 공자 저구를 군주로 옹립하고, 반대파를 억누르기 위하여 모든 신하를 제나라의 시조 태공(太公)을 모신 사당에 모아놓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들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할 것을 요구하고, 맹세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한마디로 공포정치였죠.

그러나, 안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군주와 공실을 편들지 않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드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하였죠.

최저는 이에 격분하여 안영을 죽이려 하였으나 좌우에서 가신이군주를 죽인데다 명망 높은 안영마저 죽이면 민심이 등을 돌릴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며 만류하자 안영을 죽이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안영은큰 불인을 저질러놓고 작은 인을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유유히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안영이 취한 자세는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게 됩니다.


최저와 경봉은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나, 최저의 집안은 BC 546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이에 개입한 경봉에 의해 몰락하였고, 그 이듬해 기원전 545년 진무우(陳無宇)와 포씨(鮑氏고씨(高氏난씨(欒氏) 등의 연합세력이 경봉을 공격하여 경씨 가문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이때 양 진영이 모두 경공의 신병을 확보하고 공궁을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안영은 이를 사적인 싸움으로 여기고 양측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고 경공과 공궁을 지켜냈죠.

당연히 그 뒤, 안영은 경공의 신임을 얻어 재상의 지위에 오르고, 전씨 일족인 명장 사마양저를 추천하였습니다.

제 경공은 놀이를 좋아하는 극히 평범한 군주로, 안영은 이 군주에게 수많은 간언을 올리며 제나라의 국사를 지탱하였습니다. 그 간언 내용이 안자춘추전편에 걸쳐 실려있습니다.

안영은 내정, 외교 수완이 뛰어나 제나라는 춘추오패의 제환공 시대 다음가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공자도 제나라에 임관하고자 하였으나, 안영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공자를 영입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기원전 540년에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진 평공(平公)을 알현하고, 진나라의 현신 숙향을 만나 어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전씨(진무우·전걸 부자)는 백성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인망이 두터우니, 언젠가 제나라는 전씨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카로운 예견이 그 뒤 약 150년 뒤에 실현되었죠.

 

또한,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초 영왕(靈王)은 키가 작은 안영을 창피를 주고자 하였습니다.

사람이 통과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옆에 겨우 개 정도나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을 만들어 놓고 안영에게 이를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안영은 개 나라에 사신으로 간 자는 개 문으로 들어갑니다.

신은 지금 초나라에 신으로 왔으니, 이러한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외쳤죠.

이를 들은 영왕은 어쩔 수 없이 대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왕은 이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번 안영을 골탕 먹이려 했습니다.

안영을 초영왕을 알현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 출신의 도둑을 불러 와 제나라 사람은 물건 훔치는 일을 좋아하는가?’라 말하며 또 창피를 주었습니다.

아예 사신으로도 취급하지 않았죠.

그러자 안영은 귤은 회수 이남에서는 귤()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가 됩니다.

이는 토지와 풍토의 차이입니다. 회수는 남방과 북방을 가르는 강 이름입니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이 강을 두고 남북으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제나라에서 도둑질하지 않았던 자가 초나라에 와서는 도둑질하였으니, 초나라의 풍토는 사람들에게 도둑질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받아쳤다고 합니다.

과연 이 말에는 영왕도 할 말이 없어 크게 웃으며 성인과 더불어서는 장난치는 게 아니라더니, 그 말대로군. 역으로 과인이 창피를 당했구나.’라고 안영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포악한 행실로 천하에 악명을 떨치던 영왕마저도 감탄시킨 이 일화로 안영은 귀국 후에 더욱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이 고사에서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사자성어가 나왔습니다.

안평중 혹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후인들은 안자라는 존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는 안영은 키가 여섯 자가 되지 않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나라의 한 자의 길이가 22.5cm이므로, 여섯 자는 135cm로 사서에 따르면 안영은 140cm도 채 되지 않는 단신이었죠.

그 열등감이 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작은 체구에 커다란 용기를 갖추고 있어서 항상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간언하였습니다.

제나라 안에서 잘나가는 사람도, 또 왕조차도 안영을 조심스럽게 대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안영 자신은 검약을 행하며, 소박한 생활을 고집하여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임금이 물으면 직언으로 응답했고, 물음이 없을 때는 품행을 단정하게 했다고 합니다.

마치 조선의 황희 같은 명제상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월석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현자였지만,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종종 감옥을 들락날락했다고 합니다,

안영은 월석보가 끌려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쌍두마차의 왼쪽 말을 풀어서 속죄금으로 내고 그를 태워 마차로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영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런 말도 없이 방에 들어가자, 월석보는 조금 기다리면서 화가 났죠.

그러면서 안영에게 당신과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군요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답니다.

안영은 의도적으로 그랬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암튼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옷을 다시 고쳐 입고 나와 저는 인정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대를 죄수에서 구한 사람이요. 어찌 그리 성급하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했습니다.

그러자 월석보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오. 난 군자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자기 뜻을 굽히지만, 알아주는 자에게는 자기 뜻을 펼친다고 알고 있소. 제가 죄인의 몸일 때 나에게 죄를 씌운 사람들은 날 알아보지 못했소, 그렇지만 당신이 날 풀어준 것이 날 아는 것처럼 해주어 내 뜻을 안 것으로 생각했소.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예의가 없어 보여 차라리 날 몰라주는 죄수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하자 안영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월석보를 상객으로 모셔 함께 여러 의견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재상으로 있을 때 외출하게 됩니다.
마차를 준비하고 막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과정에서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게 됩니다.

가만 보니 자기 남편이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거만스레 지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재상을 모셔다드리고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이혼을 꺼내 듭니다.

남편으로서는 청천벽력이었죠, 왜 그러냐 묻자 안영은 6자도 안 되는 분이지만 이 나라의 재상입니다. 또 아까 마차에 오른 모습 등을 보니 참으로 침착하고 진실한 태도로 마차를 타더군요. 그런 사람 옆에서 마치 재상이 된 것처럼 으스대는 당신이 너무도 창피하고 또 한 가지는 8척이나 되면서 마부꼴하는 모습이 너무도 싫었지요. 당신은 희망도 없고, 거만스러운 그런 태도가 성공할 기미도 없기에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이후로 마부는 겸손해졌으며, 사람들에게 진실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영이 그의 태도가 변할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 가사 양반 어째 태도가 겸손해졌는데 무슨 일이 있었소.’ 하자 마부는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했습니다. 안영은 자기의 잘못된 점을 바로 개선하는 마부가 맘에 들었죠. 안영은 왕에게 이런 인물이 있다고 추천하게 되어 마부는 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500년 안영은 처에게 가법을 바꾸지 말도록 유언하고 저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영이 중태에 빠졌을 때, 경공은 멀리 놀러 갔었습니다.

안영의 위독함을 알리자, 경공은 마차에 올라서 급히 서울 임치로 향했다고 합니다.

경공은 마차의 속도가 왜 이리 느리냐고 하면서 마부에게서 고삐를 뺏어 들고 스스로 말을 몰았습니다.

그것도 느리다고 느끼고 심지어는 마차에서 내려서 스스로 달려가다가 마차에 다시 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며 마침내 임치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이렇게 하진 않았겠죠.

경공은 바로 안영의 집에 들어가서는 죽은 안영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때 신하가 임금께서 신하가 죽어 이렇듯 슬피 통곡하시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라고 간하였으나, 경공은 지금 예를 따질 겨를이 아니다. 내가 옛날 선생(안영)과 공부에 놀러 갔을 때, 하루에 세 번이나 내 과실을 책망해 주었다. 이제 누가 내 과실을 바로 잡아 주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곧 내가 망하는 것이다. 지금 어찌 예를 따지겠는가라고 말하고 슬픔이 다 할 때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공, 장공, 경공 3대를 걸쳐 충성하다가 죽은 후 평()이라는 시호가 내려, 안평중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안자라고 불렀죠

현재 안영의 묘소는 중국 산둥성 쯔보 시에 있습니다.

 

사마천은 위인에 관한 수 많은 기록을 보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 안영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관중은 그냥 현인이라고 했으며, 공자는 소인배라고 했습니다.

사마천은 안영이 장공 시신 앞에서 울면서도 반역자을 치지 않은 처신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임금에 대한 충성과 쓴소리를 하면서 낯빛이 변하지 않은 것 또한 거듭 감동하면서 안영이 살아 돌아오면 난 그런 분 옆에 앉아 마차는 모는 마부가 되어도 될 만큼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사람의 올바름이 한 시대를 올바르게 만듭니다.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우린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갖는 덕망과 지혜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