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봐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호해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은 석학들이 다 다른 해석을 내놓아 일반인들은 헷갈리게 하는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5,000자 정도 83장의 알듯 모를듯한 어려운 한자로 구성된 책으로 저자는 ‘노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책 이름은 도덕경이라고 합니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정확히 집어내기 어렵고 단지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쬐금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라고 사기 열전에 전하고 있습니다.
허난성 주구시 루이 현 사람으로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의 관리로 도서관에서 책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기록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직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가 어디서 죽었는 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마천 사기열전에는 당시 조금 후배인 공자가 노자를 찾아갔다고 나옵니다.
공자가 BC551년 생이니, 노자는 그보다 나이가 많았으리라 보입니다.
공식적으로 노자의 출생년은 BC571년생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게 맞는지도 모를 연도입니다.
암튼 공자가 노자를 뵙고 예에 대해 말씀을 여쭙니다.
하니 노자는
‘ 당신이 흠모하는 옛날의 성인도 그 몸 커녕 뼈까지 썩어 지금은 말만 남았소. 아무튼 군자란 때를 만나게 되면 수레를 타는 귀한 몸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하잘것없는 몸이 되오. 훌륭한 장사치는 물건을 깊이 간직하여 밖에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군자는 훌륭한 덕을 몸 속 깊이 간직하여 외모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었소. 당신의 교만함과 다욕함과 난 체하는 것과 산만한 생각은 모두 버리시오. 내가 해줄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했답니다.
당시 공자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는 이 엄청난 이야기는 공자의 일생과 상상의 물줄기를 바꿀 계기가 되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엄청나 이야기였죠.
공자가 배운 것과는 정말 달랐다는 거지요.
충격을 받은 공자는 제자들이 있은 곳으로 돌아와 전혀 자기 의사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새라면 잘 날고, 물고기라면 헤엄치는데 도사며, 잘 달리는 짐승이라면 속도가 엄청날 것이지만 그나마 새는 화살로 잡을 수도 있고, 물고기는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아무리 빨리 달리는 것도 우리는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용이라면 잡을 수도 없고, 그것의 실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 실체가 잡히지 않으니, 그는 마치 용 같은 초월자인 것 같다. 나는 그를 뛰어 넘지도 못하지만,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공자가 조금은 공부를 덜한 나이에 노자를 만나 초월적인 힘을 말할 수 있지만, 노자의 세상 보는 관점을 공자는 죽을 때까지 보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것은 공자의 말을 집대성한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과는 엄연한 사고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누구라도 두 가지 책을 읽어보고 뜻을 새겨보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노자의 도덕경은 해석 나름이라서 다 다른 해석을 내리겠지만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러니 요즈음 공부를 많이 한 그 누구라도 일반인보다는 좀 차원이 높은 해석을 하겠지만 실상은 도의 무원함을 알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집필 당시의 한자 뜻이 현대에 와서 사뭇 다른 뜻으로 변천될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되는 면도 있지만 워낙 심원하여 헤아리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 혼란한 책을 정치권에서 좋아할 턱이 있겠냐는 추측을 해보며, 우리 조선 시대에 금서 취급했고, 극히 몇 사람만이 읽어 그나마 해석하였습니다.
아무튼 그 누구의 해석이건 간에 어렵게 느꼈다는 것을 요즈음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피상적인 면만 보면 그는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당나라 시절 받아들인 불교의 이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서 당나라 시절 불교의 해석을 도가의 해석으로 가미해야 하여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당나라에서 불교의 전파가 어렵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불교나, 도교가 혼합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경전 반야심경의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개념과 도덕경의 무위와 도라는 개념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이걸 부정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짬뽕이 되어 대중으로 퍼지게 됩니다.
불교가 당나라 시절 민중 속으로 파고들면서 만약 대륙의 사상과 이념에 맞지 않으면 민중들이 수긍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 뒤로 노자의 도덕경은 불교적 색채를 띠게 되고, 불교 또한 도가의 물감으로 덧칠해져 한반도로 넘어오게 된 것이죠.
도덕경의 첫머리만 보아도 헷갈리는 문장입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문장을 해석한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해석한 분들이 틀렸다고 보기에는 그분들의 해석이 다 달라 어느게 정답인지 더 헷갈린다는 겁니다.
어떤 석학의 해석을 보면 이렇습니다.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인 다음에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 미묘한 본체를 살피고 항상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순환하는 현상을 살핀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을 달리하며 둘다 현묘한 것이라고 해준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모든 미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도를 도라고 말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즉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여기에서 常은 영원불변이 아닌 영원 즉 변화의 지속일 뿐 영원불변은 인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도록 해준다. 노자의 도는 천도의 근원으로서 천지의 운행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킨다. 그래서 도는 천지보다도 먼저 있다.】
글쎄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도’부터 해석한 것이 헷갈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시작한 도덕경은 정치, 사회 문화, 역사, 자기 계발, 도덕 등을 아우르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버릴 게 하나도 없고 금과옥조의 보배와 같은 말들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129년 지난 다음 어느 사관이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 주나라 태사, 그러니까 사마천이 말하기를 진나라 헌공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진나라는 처음 주나라와 합하고, 합한 지 500년에 갈라지며, 갈라진 지 70년에 패왕이 될 자가 나타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노자는 그 누구도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죠.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이라고 했으며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고, 위나라 단간이라는 지역에 봉해졌다 합니다.
종의 아들은 주하고 했으며, 주의 아들은 궁, 궁의 손자는 가라는 인물인데 한나라 문제를 섬기었다 사기 열전에 전해 집니다.
세상에서는 노자를 배우는 사람은 공자의 유학을 배척하고, 유학도는 노자학을 배척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서로 상충하는 면이 많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노자가 쓴 도덕경이 어째서 써졌는지 생각지 못한 전설적인 억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노자가 세상을 등지고 서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함곡관이란 경계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키던 윤관이란 자가 노자를 알아보고 어디 가시느냐 했답니다.
그러나 노자는 세상을 등지고 가는 놈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윤관이란 작자가 눈치를 채고 노자가 가는 길을 막으면서 당시 최고의 공부를 한 노자에게 글 한 편 써 달고 했답니다.
요즈음 말로 감방에 가두었죠. 윤관은 글을 얻고 싶을 뿐 다른 의도가 없었지요.
그다음 날 글을 써주고는 노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윤관을 써준 글귀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퇴근하여 고이 모셔놓았죠. 그런데 일자무식 마누라가 그 글이 써진 종이를 불쏘시개로 썼다고 합니다. 퇴근길에 놀란 윤관은 타다 남은 도덕경을 간신이 살렸다고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자를 이야기하려면 이 도덕경의 출처를 이 잡듯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도덕경으로 삼는 것은 위촉오 삼국시대 말기에 석학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소위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가 그 왕필의 정리본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지요.
1973년도에 중국 장시성에서 발견된 고분 마왕 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에 담겨있는 문장들은 왕필 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 마왕 퇴 무덤에서 발견된 도덕경 판본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편집한 통용 본보다 연대가 훨씬 앞선다고 합니다. 왕필은 그의 생몰이 226년~249년이고 위·촉·오가 쟁패하던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리이자 사상가로 노자와는 1,0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사람이죠.
왕필본의 정리본이 바로 백서본이고,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판본도 이 백서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백서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백서본 갑 본으로서 전국시대 말기(BC 24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을 본은 한나라 초기(BC 195년 이전)에 제작된 판본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1993년 중국 화북성의 곽점촌에서 발견된 곽점본(죽간본, BC 300년 추정)은 왕필의 백서본에는 있는 중요한 시문들이 많이 빠져있으나, 백서본에는 없는 내용 일부가 있어 새로운 텍스트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주요한 차이는 곽점본은 대나무에 쓰인 반면에 백서본은 비단에 쓰져 있으며 내용 상당수가 백서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곽점본에 있고 2,000여 자로 백서본의 40% 정도의 분량이었죠.
그리고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의 내용에는 조금씩 추가된 것들이 있으며 문장 형태가 말끔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서본에는 전사과정의 기본적인 오류와 원래는 주석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본문으로 들어간 오류 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이 더욱 반 유가적인 경향을 보이고 백서본이 곽점본에 비하여 정치 술수적인 내용을 더욱 가미한 느낌이 들고, 백서본 성립 시기에 유행한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통치술에 대한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백서본은 음양사상을 받아들여 기화론적 우주생성론의 내용을 담고 있지요.
처음으로 도덕경을 상하로 나눈 사람은 주나라의 춘추와 전국시대를 규정한 전한 말기의 학자 유향입니다.
완결편 도덕경 주석서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하상공'(혹은 '하상장인')이 지은 하상공 장구가 있습니다.
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상공 장구는 당나라 시기까지 가장 유행한 판본으로 양생론적 성향이 강해 초기에는 도교도들에 의해 많이 읽혔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판본이 되었다는 이야기죠.
그야말로 천재 왕필은 18세이던 243년에 노자 도덕경 주를 완성하였고, 이후 그의 저서는 위나라의 재상 하안에 의해 점차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그의 주석서는 하상공 장구에 비해 덜 읽혔으나 송나라 때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주요한 판본으로 여겨지게 됐으며, 이 지위는 명, 청대에 더욱 확고해져서 백서본 출토 이전까지 무려 천 년 이상 동서양 도덕경 이해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을 유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았기에 많은 비판을 받아온 이유로는 백서본과 왕필본의 다른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백서본은 장절 구분이 거의 없이 이어 적혀있었으나, 왕필본은 장절 구분이 잘 되어 있고, 백서본은 덕경이 도경보다 앞에 놓이나, 왕필본은 도경이 덕경보다 앞에 놓인다는 겁니다. 즉 백서본은 덕도경이라고 불릴 수 있고, 왕필본은 우리가 익히 들은 도덕경이라 보이는 거죠. 또 왕필본의 장절구분을 기준으로 하면, 백서본은 24-22-23장과 41-40-42장, 66-80-81장의 뒤바뀐 순서로 구성되어 있고,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시대 특성상 가차자가 많이 쓰였고, 따라서 그 글자들의 해석이 복잡하게 됩니다.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뜻 모를 말이 많이 남아있어 왕필본의 끊어 읽기 문제를 다소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곽점본과 백서본 그리고 왕필본의 차이만 보아도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전설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으면서 도덕경 5,000여 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도덕경은 노자가 하룻밤에 쓴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여러 생각과 사상들이 응축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잡한 성립과정은 도덕경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어 해석하기가 어렵운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경에 모순과 여러 사상이 뒤섞여 있는 만큼, 여러 사상가와 학자마다 도덕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는데, 하상공장구는 양생술을 위한 음양 사상의 기본 경전으로서 여겼고, 왕필주는 도덕경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흠모하여 신비주의 학적으로 여긴 까닭에 현대에 와서 각자의 해석에 만족해야 하는 뜻깊은 어록으로 해석해야 할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비춰주는 말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 한 번쯤은 밤새워 읽어볼 만한 철학책입니다.
참고 : 중국이란 국명은 근래 들어와 국명이라서 고대의 이야기에 쓰기가 어려웠기에 대륙이라는 말과 역사적 나라 이름으로 가름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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