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스(Thales, BC7세기(대략 BC625년~BC624년경 ~ 대략 BC547년~BC546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토스학파의 창시자입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탈레스는 포에니케 혈통이라고 하였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1권에서 탈레스를 언급하면서 그가 포에니키아(페니키아)계 혈통이라는 주장을 남깁니다. 이는 그가 철학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포에니키아인 또는 이집트인들로부터 배웠다는 문화적 교류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후대에 탈레스가 순수한 그리스인이 아닌, 포에니키아와의 혼혈 혹은 포에니키아 이주민의 후손일 수 있다는 견해로 이어졌습니다. 포에니키아(페니키아, Phoenicia)는 고대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 셈족계 해양 무역 민족의 중심지입니다. 오늘날의 지리로 보면, 레바논(Lebanon)과 그 주변 지역에 해당합니다.

BC 460년~370년경 활동하고 원자론을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이며 탈레스보다 약 100~150년 후대 인물인 밀레토스 사람 데모크리토스는 탈레스의 아버지는 엑사미에스 (Examyes), 어머니는 클레오불리네 (Cleobuline)라고 하며 텔리데스(넬리다이 가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이 집안은 카드모스(Kadmos)와 아게노르(Agenor)의 혈통을 이어받은 명문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이 카드모스(Kadmos)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그의 혈통은 동방의 찬란한 문명과 그리스 세계의 시작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포에니키아, 또는 페니키아라 불리는 지역의 왕 아게노르(Agenor)의 아들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리비아의 후손이라는 신적인 혈통을 지닌 왕자였습니다.
카드모스의 가계는 본래 페니키아의 시돈(Sidon)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지만, 그의 생애는 지중해 세계를 넘나드는 여정으로 이어집니다.
카드모스의 여정은 누이 에우로페(Europa)가 제우스에게 납치된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아게노르는 아들에게 누이를 찾아오라고 명령하지만, 카드모스는 결국 누이를 찾지 못하고 대신 델피의 신탁을 따르게 되죠. 신탁은 그에게, 소를 따라가다가 그 짐승이 멈추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카드모스는 그리스 땅에 도달해, 나중에 테바이(Thebes)로 알려질 도시를 창건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용(드라콘)을 죽이고, 그 이빨을 땅에 뿌려 무사들—이른바 ‘스파르토이(Spartoi, 뿌려진 자들)’—를 만들어 도시의 기반을 세우게 되죠.
그리스 문명은 카드모스를 통해 문자와 지식, 제도의 기초를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카드모스는 페니키아에서 사용하던 문자를 그리스에 전한 인물로 전해지며,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인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 문자에 영향을 주었다’는 언어학적 사실의 신화적 반영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전승 속에서 카드모스는 단순한 도시 창건자를 넘어, 문자와 문명을 전한 개척자로 떠오릅니다.
카드모스는 또한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 인물로도 묘사됩니다.
그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딸 하르모니아(Harmonia)와 혼인하여,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는 인물이 되며 결혼은 고대 신화에서 보기 드문 조화로운 결합으로, 문명화된 질서의 상징이 됩니다. 그들의 후손은 테바이 왕가를 이루며, 훗날 오이디푸스와 같은 비극적 인물들로 이어집니다.
카드모스의 가계, 곧 아게노르의 혈통은 단순한 왕가를 넘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 페니키아, 크레타, 소아시아 등 다양한 문명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신화적 구조물입니다.
그의 형제 포이닉스는 페니키아라는 지역명과 연결되며, 또 다른 형제 킬릭스는 소아시아 남부의 킬리키아(Cilicia) 지역의 기원과 관련됩니다.
여동생 에우로페는 제우스에 의해 크레타로 이끌려가 미노스 왕의 어머니가 되며, ‘유럽(Europe)’이라는 지명의 상징적 기원이 됩니다.
믿거나 말거나 탈레스는 이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죠.
탈레스의 출생지 이오니아는 기원전 1150년경 이오니아인(이오니아 방언을 사용하는 그리스인)이 거주했던 서부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의 영토였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철학의 발상지(밀레투스)이자 기원전 490년과 480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을 촉발한 이오니아 반란의 발상지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는 미케네 문명(기원전 1700년~1100년경) 정착민들이 거주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무역을 위해 수로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내륙 지역은 청동기 시대 붕괴(기원전 1250년~1150년경) 전까지 히타이트 제국(기원전 1400년~1200년)의 영토였지만, 그들의 영토는 이오니아가 될 해안 지역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 프리기아 왕국은 카리아, 리디아, 미시아와 함께 이 지역에 세워졌으며, 이 세 나라는 북쪽의 헤르무스 강 하구에서 남쪽의 마이안데르 강까지의 지역을 지배했는데, 이 지역은 훗날 이오니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탈레스가 7현인 중 한 명이라는 전통은 흥미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통의 기원 중 하나로 종종 거론되는 것은 팔레론 사람인 데메트리오스(Demetrios BC350〜BC280년)가 작성한 최고행정관 목록입니다.
이 기록에서 데메트리오스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지혜와 덕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공식적으로 정리하며, 탈레스를 포함한 7 현인의 명단을 제시했습니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이 이 명단을 받아들이면서, 탈레스가 고대 그리스 지혜의 대표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7 현인의 전통은 단순한 구전이나 민간 신화뿐 아니라, 당시 정치·행정 기록과 학문적 전승을 통해 공식화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즉, 탈레스가 7 현인의 한 명으로 알려진 데에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뿐 아니라, 데메트리오스의 최고행정관 목록 같은 공식 기록이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탈레스가 포에니케에서 추방당하고 온 네일네오스와 함께 밀레토스에서 시민권을 얻었는데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와 페니키아 사이의 문화적 교류와 인물 이동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탈레스는 페니키아 출신이거나 페니키아와 깊은 연관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네일네오스’라는 동료와 함께 어떤 이유로 페니키아에서 추방당해 밀레토스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밀레토스는 당시 동지중해에서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자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했기에, 외부에서 온 지혜로운 이방인들이 정착하여 시민권을 얻고 도시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탈레스와 네일네오스는 밀레토스 사회에 통합되어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탈레스는 이후 밀레토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탈레스가 단순한 그리스 토착 인물이 아니라, 동방의 영향과 교류를 받은 인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탈레스가 페니키아의 문명과 상업적, 문화적 접촉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일네오스와 같은 동행자가 있었다는 것은 그의 배경과 활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아테네에서 “디마시아스(Dimasias)”라는 사람이 최고 행정관(아르콘)을 지낼 때 “지혜로운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아테네에서 디마시아스(Dimasias)가 최고 행정관, 즉 “아르콘”으로 재직한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에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우나, 아르콘은 고대 아테네에서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위 관직으로, 처음에는 종신직이었으나 점차 10년 임기, 그리고 나중에는 1년 임기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에포니모스 아르콘”이라 불리는 최고 행정관은 1년 동안 재임하며 아테네의 정치, 사법, 종교 분야를 총괄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아르콘은 아테네의 사회 질서 유지와 법 집행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 이름은 연도 명으로도 사용되었다.
“디마시아스(Dimasias)” 라는 이름은 고대 아테네 아르콘 명단에 일부 기록되어 있으나, 그가 활동한 시기나 구체적인 임기 연도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그가 최고 행정관으로 일한 시기는 아테네 정치가 점차 체계화되던 BC 7세기에서 6세기 무렵일 가능성이 높죠
이 시기는 그리스 사회 전반에 걸쳐 철학과 정치사상이 발달하고, ‘7현인’과 같은 현자들이 정치와 도덕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시기와 겹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마시아스(Dimasias)가 아르콘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아테네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기틀을 다져가던 중요한 변혁기였으며, 그의 재임 기간에 지혜로운 인물들이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디마시아스가 아테네 행정과 사회 질서에 일정한 기여했던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탈레스(Thales)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로서 널리 알려졌지만, 직접 남긴 저술은 전혀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탈레스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등의 후기 저술가들에 의해 전해진 2차 자료입니다.
고대에는 그가 천문학에 관한 저술, 특히 ‘항해용 천문 안내서’를 남겼다고 전해진 바 있지만,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습니다. 일부 고대 저자들은 이 책을 탈레스의 작품으로 보았으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이 책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모스 사람 포스토(Positos 또는 Phostos)"라는 인물의 저술이라고 주장합니다.
한편 “칼리마코스(Callimachus BC3095〜240년)”는 오늘날의 리비아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 키레네(Cyrene)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학자였습니다.

그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지며, 후대 전승에 따르면 그가 쓴 시와 문학적 저작물은 800편이 넘었다고 합니다. 온전히 전해지는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시집 『아이티아(Aetia)』가 있으며, 이 작품은 다양한 그리스 도시와 전통, 제의의 기원에 대한 시적 해석을 담고 있고, 이 밖에도 『헤칼레(Hecale)』라는 서사시, 신들에게 바친 찬가들(Hymns), 풍자적 시풍을 담은 『이암보스(Iambi)』, 그리고 섬세하고 정제된 표현으로 구성된 에피그램들(Epigrams) 등이 있습니다.
칼리마코스의 『이암보스』에서 탈레스가 “작은곰자리의 발견자”로 언급된 것은, 단순한 천문학적 기여 이상으로, 탈레스를 동서 지식의 교량이자 고대 지혜의 상징으로 재현하려는 문학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가 실제 별자리를 '발견'했는지 여부보다, 그리스 지성계에 미친 영향과 문화적 상징성을 강조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칼리마코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탈레스는 다른 면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특히 페니키아인들이 항해에 사용하는 작은 별자리, 즉 '작은 수레'의 희미한 별들을 측정했다고 전해진다."
이 구절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의 『철학자 열전』(1.23)에서도 인용되며, 탈레스가 작은곰자리를 식별하고 이를 항해에 활용하도록 한 최초의 인물로 묘사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고대 과학사 최초의 체계적 서술자로 알려진 에우데모스(Eudemus of Rhodes)는 탈레스(Thales of Miletus)를 고대 그리스 천문학의 선구자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탈레스가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하지와 동지의 시점을 최초로 정립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태양의 주기적 움직임을 이해하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기여였습니다.
또한, 에우데모스는 탈레스가 태양의 일주 궤도가 항상 일정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태양의 움직임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천체의 복잡한 운동을 이해하려는 초기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에우데모스는 탈레스가 BC 585년에 일어난 일식의 원인을 달이 태양을 가리는 현상으로 설명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탈레스가 일식의 원인을 자연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고대 세계에서 탈레스(Thales of Miletus)를 경이로운 인물로 여겼으며, 그의 지적 통찰력과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크세노파네스(BC 6세기)는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자연 현상에 대한 전통적 신화적 설명을 비판하고 이성적 탐구를 중시한 인물입니다.
그는 종종 시를 통해 탈레스를 언급하였는데, 그 이유는 탈레스가 신의 개입 없이도 자연을 설명하려 한 첫 철학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탈레스는 "모든 것이 물에서 왔다"라고 고 하며 세계의 기원을 자연적 원소로 설명했고, 천체 현상(예: 일식이나 별자리)을 신화가 아닌 물리적 원인으로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크세노파네스는 탈레스를 자연철학의 선구자이자, 지혜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헤로도토스(BC 5세기)는 『역사』(Histories) 1권에서 탈레스가 BC 585년의 일식을 예언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리디아인들과 메디아인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BC6세기 초, 소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두고 두 강대국이 여러 해 동안 충돌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585년 5월 28일, 양국이 치열하게 맞붙은 전투 중에 갑작스러운 일식이 발생하였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일식이 탈레스에 의해 정확히 예측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참고 『역사』(Histories) 1권 74)
탈레스는 천문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일식이 언제 일어날지를 미리 알아내었으며, 이 사실을 리디아인들에게 알렸다. 당시 일식은 신이 내리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기 때문에, 전투 도중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자,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큰 공포에 휩싸였다. 이에 따라 양군은 전쟁을 즉시 중단하고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일식 사건은 실제 역사적 사실로도 인정받고 있으며,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개기일식이었다.
이 사건은 탈레스가 자연 현상을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이성과 계산을 통해 이해하고 예측한 최초의 인물임을 보여준다. 또한 철학자의 과학적 지식이 실제 국제 분쟁의 중재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탈레스는 이 일화를 통해 단순한 철학자나 수학자를 넘어, 예언자적 이미지와 함께 고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후대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따라서 탈레스는 자연 철학의 출발점이 단순한 사변적 탐구를 넘어 현실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자연과 인간 세계를 이성으로 연결한 최초의 ‘이성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시인 코이릴로스(Choirilos)의 탈레스에 대한 평가를 보면 코 철학과 자연 현상에 대한 시적 표현을 통해 지혜와 자연철학자들의 업적을 기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대 시인들은 탈레스를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자연의 근원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한 현자이자 지혜로운 선구자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특히, 탈레스가 “모든 것은 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주장과 천문학적 발견들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자연의 신비와 질서를 설명하는 소재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코이릴로스 역시 탈레스를 이성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를 탐구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신화적 설명을 넘어선 자연철학의 선구자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탈레스를 통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지혜의 빛을 얻었다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시인 코이릴로스(Choirilos)는 헤로도토스의 친구로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5세기 초, 강력한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끄는 페르시아 제국과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중요한 군사적 충돌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넓은 영토를 정복하며 팽창을 계속하였고, 그 과정에서 소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지배하려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전쟁은 기원전 492년부터 490년까지 이어졌으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주도하여 그리스를 침공하였습니다. 특히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이후 두 번째 전쟁은 기원전 480년부터 479년까지 벌어졌으며, 이때는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대규모 페르시아군이 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 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년)는 탈레스를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초자이자 자연철학의 창시자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탈레스를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최초로 자연 현상을 신화가 아닌 자연적인 원리로 설명하려 한 철학자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한 점에서 후대 철학과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 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언급했습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가 피라미드의 높이를, 그림자를 통해 측정하거나 일식을 예측한 일화 등을 통해, 그는 실용적인 지식과 이론적 탐구를 결합한 학자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이론들이 완전하지는 않았다고도 평가했습니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단정한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며, 실제 자연의 복잡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며, 이후 철학자들이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힙피아스(Hippias)의 탈레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자연철학과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로, 특히 자석과 호박(그리스어로 ‘elektron’)에 관한 관찰로 유명합니다. 이에 대해 힙피아스(Hippias)는 탈레스가 자석과 호박의 신비로운 성질, 즉 자력을 통해 물체를 끌어당기는 현상에 주목했다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탈레스는 호박을 문지르면 가벼운 물체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이를 ‘전기적 현상’의 최초 발견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시 이 현상은 매우 신비하게 여겨졌으며, 탈레스는 이러한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석에 관한 기록도 비슷한 맥락에서, 탈레스가 자연 현상에 내재한 힘과 원리를 이해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힙피아스는 이와 같은 탈레스의 관찰을 통해 그가 단순한 신화적 설명을 넘어서, 경험과 관찰에 근거한 자연 철학적 탐구를 시도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하나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탈레스의 자석과 호박에 관한 연구는 고대 과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전기학과 자기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에피다우로스 출신 팜필레의 기록에 따르면, 탈레스는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기하학을 배운 후, 직각삼각형을 원에 내접시키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는 탈레스가 단순히 철학적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기하학적 원리를 탐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탈레스가 이집트에서 배운 기하학 지식을 바탕으로 직각삼각형과 원 사이의 관계를 규명한 것은 고대 기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업적은 후대 그리스 수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탈레스가 서양 수학과 과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잘 나타냅니다.
따라서 팜필레의 기록은 탈레스가 이집트의 실용적 지식을 흡수하여 이를 체계적인 기하학 이론으로 발전시킨 최초의 학자 중 하나임을 강조하는 중요한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탈레스는 정치적 사안에서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합니다.
해로도토스에 따르면 밀레토스 인들은 페르시아의 키로스대왕과의 협정에서 평화를 약속받았습니다,
이 협상전에 벌어진 전투가 팀브라 전투(Battle of Thymbra)입니다.
팀브라 전투(기원전 547년)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대왕, 기원전 550-530년경 재위)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기원전 560-546년 재위) 간의 결정적인 교전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승리로 리디아 왕국은 멸망했고, 리디아는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되었습니다. 키루스는 영토를 확장하고 아케메네스 제국을 완전히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여동생 아리예니스를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기원전 585-550년 재위)와 결혼시켰고, 메디아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할리스 강을 두 나라의 국경으로 정했습니다.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를 축출하자,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할 기회를 포착하고 할리스 강을 건너 군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크로이소스와 키루스의 군대 사이에 프테리아에서 결전이 벌어졌지만 승패가 갈리지 않았고, 크로이소스는 수도 사르디스로 후퇴하여 관례대로 겨울 동안 군대를 대부분 해산하고 키루스도 마찬가지로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크세노폰(기원전 430년경-기원전 354년경)에 따르면, 키루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군대를 해산했지만, 대신 공격을 감행하여 사르디스로 진군하여 팀브라 평원에서 크로이소스를 만났습니다.
키루스는 군대 선두에 낙타를 배치하여 리디아 기병대를 분산시켰는데, 이는 리디아 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기병대를 전열의 틈으로 몰아내 크로이소스를 격파하고 도시 안으로 몰아냈습니다. 14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사르디스는 함락되었고, 크로이소스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크로이소스는 델포이의 신탁에게 키루스를 공격할지 여부를 묻는 사절을 보낸 후 적대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는데, 이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했던 리디아 왕국이 바빌론과 동맹을 맺었던 리디아를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리디아가 정복되자 키루스는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점령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두고 아케메네스 제국을 건국했습니다.
이때 크로이소스왕 지배하에 있었던 밀레토스에 군대 지원군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밀레투스는 응하지 않았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결국 크로이소스 왕은 패배하였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의 키로스는 밀레투스를 정벌하지 않고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애초 전쟁 전 크로이소스 왕이 페르시아 군과 싸울것인가 싸우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신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애매모호한 신탁을 받게 됩니다. 당시 리디아의 크로이소스는 그 점괘를 보고 자의적 해석을 하였습니다. 싸워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키로스왕이 이끄는 군대를 먼저 칩니다. 그러는 중에 할뤼스 강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죠.
이때 크로이소스가 고민하기 시작했죠. 이것만 넘으면 페르시아 군을 깰수 있을텐데 하고...
탈레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냅니다. 군영의 앞뒤로 해자를 팝니다.
현재 흐르던 강의 지류를 바꾸어 왼쪽에 흐르던 것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합니다.
강물의 방향이 바뀌어 원래의 하상에서 해자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군대가 원래의 하상을 건너가자 이제 원상 복구하는 방법으로 걸어서 갔다는 겁니다.
조금 황당무계하지만, 헤로도토스 역사의 1권 75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크로이소스 왕에게 탈레스가 도와 주긴 했으나 군대를 파견하지 않아 밀레투스는 페르시아 키로스왕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래 탈레스는 정치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죠.
그리고 국가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설에 탈레스는 결혼을 하였다 하고 퀴비스토스라는 아들도 얻었다고 하지만 탈레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고 그의 아들은 그의 여동생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탈레스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결혼하지 않습니까?”
탈레스는 대답했습니다:
“때가 아직 이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도 결혼하지 않자, 또 누군가가 묻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데, 왜 아직도 결혼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탈레스는 이번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오.”
이 일화는 탈레스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철학자다운 방식으로 설명한 예로 자주 인용됩니다.
로도스(Rhodes)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of Rhodes)의 저서 “잡다한 기록들”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다양한 일화와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저서에서 탈레스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탈레스가 밀레토스의 철학자 중 첫 번째로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탈레스가 자연 현상을 신화적 설명이 아닌 자연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철학적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또한, 히에로니무스는 탈레스가 "모든 것은 물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주장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탈레스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그가 자연의 근본 원리를 찾으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정치학”에 소개된 탈레스 일화에서 소개된 이야기는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두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요?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아무 생각없이 팔았죠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P.F. O`Grady(2002) 의 저서 “Thales of Miletus” 중 탈레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탈레스가 "1년을 365일로 나누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탈레스가 하지와 동지(여름과 겨울의 가장 긴 낮과 가장 긴 밤)를 기준으로 태양의 이동 경로를 관찰하여, 1년의 길이를 약 365일로 추정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측은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자들이 이미 사용하던 방법과 유사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시리우스 별의 주기적인 출현을 기준으로 연도를 설정했으며, 이는 약 365일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탈레스는 이집트의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스에서 365일 연도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탈레스가 365일 연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주장이 고대 문헌의 해석에 따른 것일 수 있으며, 실제로는 이집트의 천문학 지식이 그리스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1년을 360일로 계산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탈레스가 365일을 정확하게 계산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AD347 - 420년) )가 언급한 "탈레스의 피라미드 높이 계산 이야기"는 고대 철학자 탈레스(Thales of Miletus)의 지혜와 초기 기하학적 사고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원후 3세기 고대 그리스의 전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나 플루타르코스(Plutarch) 같은 고대 저술가들에 의해 전해졌습니다.
탈레스는 이집트를 여행하던 중, 그림자와 해의 각도를 이용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다고 전해집니다. 탈레스는 어느 날, 자신 그림자의 길이와 키가 같은 순간을 이용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내 그림자의 길이가 내 키와 같다면,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도 피라미드 높이와 같을 것이다."
이 순간을 포착하여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재고, 그것을 곧바로 피라미드의 높이로 간주했습니다. 이는 유사 삼각형(닮음) 개념에 기반합니다.
참고문헌 : 헤로도토스의 역사;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이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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